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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그림 사람이야기

김영희 닥종이 조형전에서 -독일에서 느끼는고향

김영희 닥종이 조형전에서-독일에서 느끼는 고향-
갤러리현대 2003 12.17 - 2004 1.25

둥글고 통통한 얼굴의 우리 모습을 한지의 독특한 살가움으로 표현한 닥종이 공예의 원조인 김영희님의 전시가 모처럼 열린다기에 찾았다
알다시피 작가는 닥종이라는 새로운 소재로 나름의 장르를 연 것 못지 않게, 그녀의 삶 또한 보통 사람의 그것보다는 싱싱하다.
다시 말하면 작품성이 있다는 말도 된다. 그러나 그걸 14살 연하의 청년과 재혼한 세 아이의 엄마 이런 도식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그녀의 삶을 진지하게 사랑하는 태도다. 그런걸 수필집에서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작품을 또는 책을 통해서 그녀의 모습을 아끼는 마음이리라.

그런데 이번 작품에서는 조금 달라진 그녀를 보았다 . 고향을 그리워하는 ....
그러나 지금 그녀의 회색 빛 독일 하늘 아래 그들 특유의 차콜색 혹은 짙은 밤색옷을 입고 있었다 독일 사람들의 색깔은 채도가 낮다. 그래서 어둡고 짙다 .. 언 듯 언 듯 보이는 꽃 분홍이 우리 어릴 적 진달래를 떠올리게 하는 것을 빼고 나면 .
둥글고 납닥한 얼굴의 실처럼 가는눈을 가진 아이는 헨델과 그레텔 처럼 서양아이의 모자를 쓰고 목도리를 둘렀다. 그리고 고구마순을 쳐다보는 대신 감자순을 껴안고 있다. 의류 수출 회사에서 일할 때 늘 느끼던 독일사람들의 그 침침한 가라앉은 색.
나는 거기서 독일을 보았다.

산다는게 이런 거구나 ...
갑작스럽게 그녀의 삶의 무게가 전해졌다. 독일 냄새가 난다고 그녀의 작품을 비하하고 싶지 않다. 아니 오히려 이게 그녀의 지금 모습이고, 그녀 자신을 누구보다 솔직하게 표현하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 작품을 대할 때 마다 늘 느끼는 생각이지만 그림이 작가의 표현이라면 그가 속해 있는 자신의 언저리, 더 넓은 눈으로 볼 때 흔히들 이야기하는 그 시대의 사람들의 삶은 느낀다 역사에 관심이 있는 나로서는 그때 작가가 보이고 그 시대의 사람의 삶이 보인다.
이때 나는 그림을 보는 희열을 느끼고 가슴이 뛴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꾸루베의 칙칙한 사실주의 그림 속에서 나타난 인상파의 화사한 색상 ... .을 발견하고 마네 모네 고호 세잔의 그림을 보고 흥분을 느꼈던 당시의 사람을 이해했다면 너무 지나친 것일까.

마침 화랑에 나와 있는 그녀에게 사인을 부탁하며 어떻게 다섯 살 때 한지를 만질 수 있었냐고 물었다. 다섯 살 나이 적 그녀 앞에 놓인 환경이 궁금해서였다
집에서 한지를 다루었단다. 그래서 파지가 많았고 알다시피 한지는 물을 무쳐도 쉽게 녹지 않으니 그만큼 좋은 장난감이었고 그때의 그런 놀음이 아마도 조각을 전공하게 한 거 같다고.
그녀는 먼 나라 그녀가 독일에 갔을 때쯤은 독일은 우리에게, 아니 독일에선 우리 한국은 먼 나라였을 것이다. 그녀는 고향이 그리웠고, 그런 그리움은 어릴 적 놀이의 기억을 새로운 재료와 특유의 조선냄새 나는 조형을 만들어 내는 힘이 된 거 아닐까.

근데 이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독일과 한국의 경계에 있다.
독일인 남편 그 피가 섞인 자신의 아이들 ... 그리고 하늘 나무 음식, 집...주변의 일상이 독일의 땅위에 있다. 그녀는 독일 사람이다. 그러나 가슴속 깊은 곳엔 늘 한국을 담고 있다. 고향을.

<독일사람도 많이 좋아하지요>라는 친구의 말에 < 네 작품으로 좋아하지요.
한국사람은 인형으로 좋아하고요 > 그들에게 이런 통통한 실눈이는 친근한 사람의 모습은 아닌 게로구나. 친근한 모습을 인형이라 하지 .사람의형상이니. 우리는 그녀의 작품이 친근한 내 어릴적 모습 우리네 동네의 모습인데.
인형 뒤편에 걸려있는 그녀의 그림들이 모두 회색 빛깔이었다 .그녀의 마음이 회색이구나. 독일의 회색 하늘이 그녀의 마음에 들어 있구나
회색인...
경계인.. 결국 같은 말이 아닌가 .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아니 두 곳에 다 속해서 어느 곳도 선택 할 수 없는
다시 말하면 두 곳을 다 포기 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때론 그들에 의해 우리의 경계가 넓어지겠지.

이번 전시에서 난 고향을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그러나 독일인 그녀를 보았다.

둘째 생각

전시를 보는 내내 또 하나 내 머리를 맴도는 생각
만약 작가가 독일에 있지 않고 한국에 계속 있었다면 지금은 어떤 모습의 인형을 어떤 색깔의 옷을 입혔을까 삶에 성실한 그녀의 작품이 한곳에 머무르지는 않으리라.
지금 책이름은 잊었지만 작년에 보았던 우리전통 직조 즉 천들의 사진 집에서 보았던 문양 색상이 생각났다 .
특히 취 빛 아니 피코크 블루에 가까운 청색바탕에 흰색무늬가 있던 천 ... 생각보다 다양한 문양 고구려 신라때 그 이전 것도 있었던 것 같다. 문양의색상의 아름다움과 세련됨에 그렇게 놀랐는데도 1년도 안되어 이렇게 잊어버리다니.
지금도 우리에게 낯설지 않고 현대에 재생해도 촌스럽지 않은 한적의 표지 문양집도 생각났다. 아마도 그녀가 새롭게 발굴된 많은 자료를 통해 우리의 냄새와 색깔을 더 맛 나게 가꾸지 않았을까 .

셋째 생각

전시회나 음악회에 대한 글을 신문이나 잡지에서 접할 때 내가 의아해지는건
왜 그 속에선 작가가 자라지 않을가 .
작가의 작품은 생명이 있다. 처음 등장 할 때의 신선한 충격은 세월 따라 새로운 모습으로 자란다. 그러지 않으면 그 작가는 죽은 거다. 그런데 늘 작가에게 처음 붙여준 이름표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세월이 가도 주민등록 사진은 늘 이십대의 젊은 시절인 채로 있는 것처럼. 게으른 작가는 그 사진 속에 숨고, 때론 살아 있는 작가를 석고처럼 만든다. 지금의 20대는 10년전에 10대였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그 시절 서태지와 지금의 서태지가 다르다. 같은 사람이라도 이미 의미는 다르다. 같은 십대이지만 지금의 십대들은 그 시절의 서태지와는 다르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는데 같은 십대라는 이유로 10년전의 십대와 지금의 십대를 같이 줄을 세운다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은 절대로 두 번 있을 수는 없다. 그래서 늘 같은 작품도 새롭게 보여져야 한다. 그게 생명이다..